회의실 화이트보드에 한 단어가 적혀 있습니다. 작년 전략 워크숍 때 쓴 단어인데, 정확히 1년이 지난 지금 다른 단어로 새롭게 바꿀 참입니다.
작년에는 "헬스케어"였습니다. 올해는 "라이프스타일"이 되거나, 어쩌면 "테크"가 됩니다. 단어가 바뀌는 동안 회사 자체는 같은 제품을 팔고, 같은 매장에 있고, 같은 소비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바뀐 건 한 단어, 그리고 그 한 단어에 맞춰 다시 그려진 수 많은 PPT와 WORD 자료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23년 동안 셀 수 없이 봐왔습니다.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적힌 카테고리 정의가 매년 다르게 적혀 있다면, 그 회사는 카테고리 함정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테고리 함정은 다른 어떤 실패보다 늦게 발견됩니다. 매출이 빠진다거나 점유율이 흔들린다거나 하는 표면 신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다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직원들에게 "우리 회사가 뭐 하는 회사예요?"라고 물어보면 서로 다른 답이 나옵니다. 마케팅 팀, 영업 팀, 개발 팀, 재무 팀, CEO실까지 모두가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Series 1에서 4-Layer의 가장 아래에 카테고리를 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카테고리는 다른 모든 결정의 디폴트 값입니다. 포지셔닝은 그 카테고리 안에서 의미를 갖고, 아키텍처는 그 카테고리에서 자라난 모브랜드·서브브랜드 관계 위에 쌓이고, 실행은 그 카테고리에서 통하는 채널과 캘린더를 따라갑니다. 첫 단추가 매년 바뀌면, 뒤에 채워지는 모든 단추가 얼라인이 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어긋남이 1년, 2년 단위로는 잘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보고서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니까요. 단어 하나만 바꿔도 보고서는 논리적입니다. 시장에서 그 단어 변경이 만들어내는 균열은 3년, 5년이 지나서야 서서히 드러납니다.
두 케이스를 보겠습니다.
Peloton: 자전거인가, 미디어인가, 웰니스인가
Peloton의 카테고리 표류는 거의 교과서적입니다.
처음에는 분명했습니다. 고급 실내자전거를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 가격대는 프리미엄, 타깃은 집에서 운동하는 도시 거주자. 카테고리 정의가 명확했기 때문에 제품도, 매장도, 마케팅도 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문제는 IPO 전후로 시작됐습니다. 하드웨어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경영진은 회사를 "콘텐츠 구독 플랫폼"으로 재정의하기 시작합니다. 자전거는 콘텐츠를 전달하는 디바이스일 뿐이고, 진짜 사업은 월 구독료가 만드는 미디어 비즈니스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정의는 보고서 안에서 매력적입니다. 밸류에이션 멀티플이 다르고, 성장 스토리가 더 있어보이고, 투자자 미팅에서 박수가 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고 매출이 폭증했습니다. 자전거가 팔린 거였습니다. 콘텐츠 구독이 폭증한 게 아니라, 하드웨어 단품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시점에 경영진의 카테고리 정의는 한 번 더 흔들립니다. "우리는 결국 하드웨어 회사인가, 미디어 회사인가, 아니면 웰니스 라이프스타일 회사인가?"
각각의 정의는 전혀 다른 회사를 요구합니다. 하드웨어 회사라면 생산 캐파를 늘리고, 공급망을 최적화하고, 제조 원가를 잡아야 합니다. 미디어 회사라면 스타 강사를 영입하고,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늘리고, 구독 이탈률을 관리해야 합니다. 웰니스 라이프스타일 회사라면 운동 외 영역(수면, 명상, 영양)으로 확장하고, 브랜드의 의미 자체를 다시 짜야 합니다.
Peloton은 셋 다 했고, 셋 다 어정쩡하게 했습니다. 코로나가 끝났을 때, 과잉 생산된 자전거 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트레드밀 라인업, 그리고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한 구독자 수였습니다. 주가는 고점 대비 90% 넘게 빠졌고, CEO가 두 번 바뀌었으며, 직원 상당수가 회사를 떠났습니다.
카테고리 정의 하나가 흔들렸을 뿐인데, 사업 자체가 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카카오: 100개 자회사 너머에 무엇이 남는가
카카오는 결이 다른 카테고리 함정 케이스입니다. Peloton이 전략 단계의 카테고리 표류였다면, 카카오는 확장 누적의 카테고리 표류에 가깝습니다.
2010년 카카오톡이 출시되었을 때 카테고리 정의는 단순했습니다. "모바일 메신저." 빠르게 국민 메신저가 됐고, 거기까지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다음 합병, 모빌리티, 뱅킹, 페이, 엔터테인먼트, 게임, 웹툰,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자회사 라인업. 카카오는 어느 시점부터 "카카오톡을 만든 회사"가 아니라 "다 한다는 회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카카오의 카테고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회사 안에서도 답이 갈렸습니다. 누군가는 메신저, 누군가는 플랫폼, 누군가는 라이프 인프라, 누군가는 대기업 복합회사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카카오의 왔다갔다의 끝없는 표류가 들어난 큰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2022년 10월 SK C&C 데이터센터 화재였습니다. 카카오 주요 서비스가 동시에 멈췄고, 일부 서비스는 5일 넘게 정상화되지 못했습니다. 그 한 번의 장애가 카카오의 정체성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메신저 회사가 멈춘 게 아니라 국민 생활의 인프라가 멈춘 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사 내부의 위기 대응은 메신저 회사의 그것에 가까웠습니다. 책임의 무게도, 보상의 범위도, 외부 커뮤니케이션의 톤도, 카테고리 정의가 흔들리는 자리에서 모두 어긋났습니다.
여기서 카테고리 함정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카테고리를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면, 회사는 평소엔 모든 카테고리를 자처할 수 있지만, 위기가 오면 어느 카테고리의 의무도 지지 못합니다. 이미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가 별도 상장되어 있던 상태였고, 화재 이후 카카오 그룹 전체의 신뢰도와 주가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 이유 중 하나가, 카테고리 정의의 부재에서 출발한 누적된 균열이라고 봅니다.
왜 보고서는 매년 다른 카테고리를 적는가
누구도 일부러 카테고리를 흔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보고서의 첫 페이지는 매년 다른 단어로 시작될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밸류에이션의 끌어당김입니다. Peloton의 사례가 보여주듯, 어떤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지가 회사의 멀티플을 결정합니다. 하드웨어 회사보다 SaaS 회사가, SaaS 회사보다 플랫폼이, 플랫폼보다 AI 회사가 더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시장에서, 보고서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카테고리를 위로 옮기려는 끌어당김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당화 가능한 해석을 찾아 카테고리 정의를 옮기는 일이고, 그 정당화는 꽤 정교합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둘째, 확장의 누적입니다. 카카오 사례가 보여주듯, 매번의 확장 결정은 그 자체로는 합리적입니다. 메신저에서 결제로 가는 것도, 결제에서 뱅킹으로 가는 것도, 각각은 인접 카테고리 확장이라는 논리로 설명됩니다. 문제는 이 확장이 누적되면서 "그래서 이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에 대한 답이 점점 모호해진다는 점입니다. 각 확장 결정은 정합적이지만, 전체 누적은 정합적이지 않습니다.
셋째, 신임 임원의 리프레임입니다. 새 CEO나 CMO가 들어오면 자신의 색깔을 입히고 싶어 합니다. 그 가장 빠른 방법이 카테고리 정의를 다시 쓰는 일이고, 그 결정은 회사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처럼 보입니다. 새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새 캘린더가 나옵니다. 다만 시장은 그 임원이 바뀐 줄도, 카테고리가 바뀐 줄도 모릅니다. 시장은 작년의 그 회사를 기억합니다.
카테고리 함정이 위로 번지는 경로
카테고리 정의가 흔들리는 회사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Layer 2(포지셔닝)입니다. 카테고리가 바뀌면 포지셔닝의 비교군이 바뀌고, 비교군이 바뀌면 차별화의 좌표가 다시 그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카테고리가 매년 흔들리는 회사의 포지셔닝 스테이트먼트는 결국 다음 시리즈의 패턴인 포지셔닝 인플레이션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다음으로 Layer 3(아키텍처)이 흔들립니다. 카테고리가 명확하지 않으면 모브랜드와 서브브랜드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고, 자회사 정리도 라인업 정리도 미뤄집니다. 카카오의 자회사 다발은 카테고리 정의의 부재가 만들어낸 아키텍처의 누적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Layer 4(실행)에선 가장 빠르게 균열이 나타납니다. 채널 전략, 캘린더, KPI가 카테고리 정의를 따르지 못해서 부서마다 다른 KPI로 일합니다. 한쪽에선 가입자 수를 보고, 한쪽에선 거래액을 보고, 한쪽에선 매출을 봅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데, 각자가 다른 회사의 KPI로 평가받고 있는 풍경이 만들어집니다.
이게 카테고리 함정의 가장 까다로운 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두 열심히 일하지만, 합쳐놓고 보면 각자가 다른 회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어떻게 이 함정을 빠져나올수 있는가?
빠져나오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어렵습니다. 한 줄짜리 답을 내는 일입니다.
회사의 카테고리를 한 줄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___ 회사다"의 빈칸에 들어갈 단어 하나. 단어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바일 메신저이자 라이프 플랫폼이자 결제 인프라이며 AI 컴퍼니다"라는 답은 답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길어진 답은, 시장에 도착할 때 한 글자도 안 남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 한 단어를 정하는 일은 회사 안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다른 가능성을 모두 닫는 일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어렵고 심리적으로도 어렵습니다. 한 단어를 정하는 순간 그 단어와 맞지 않는 자회사, 라인업, 캠페인이 갑자기 잘못된 결정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많은 회사가 그 한 단어 결정을 미룹니다. 미루는 사이에 보고서는 매년 다른 단어로 시작되고, 카테고리 함정이 계속됩니다.
다음 글은 두 번째 패턴, 포지셔닝 인플레이션입니다. 카테고리가 결정된 후에도 그 카테고리 안에서 한 줄짜리 포지셔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다룹니다. 임원이 가장 선호하고 맘에 들었던 한 줄이 매장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 그게 두 번째 패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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